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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유네라 시오탄트, 그녀의 이야기 : 지워버린 시간
WRITTEN BY . Logann    DATE . 160825

선명하게 기억한다. 숨 막히던 공기, 부정하고 싶던 그 순간을.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 아버지.

*

모든 집이 그럴 줄 알았다. 지하 실험실에선 항상 기괴한 비명과 광기로 흠뻑 적셔진 환희어린 웃음소리, 그리고 분노에 찬 노성. 그 모든 것들이 벽을 타고 기어올라 내 방문을 두드릴 때면 나는 집요정 모라를 불러 품에 꼭 끌어안고 숨을 죽이곤 했다.

기억하는 가장 앞의 기억부터 뒤범벅 되어있는 그것은 두렵지 않았다, 정말로. 그건 익숙했고 당연했으며 일상이기까지 했다.

*

"유네라, 인사하렴. 네 오빠란다, 스큅이지!"
밝은 어머니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어린마음은 다정스레 어깨에 올려진 그 손마저 질투했다.
"그만해. 유네라, 이름은 알 필요 없으니 식사하고 어서 방에 들어가도록."
덤덤한 얼굴로 서둘러 식사할 것을 명하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나는 영혼마저 얼어버릴 푸른 눈으로 바라보면서, 기대어린 눈으로 연신 오빠라는 남자를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깨에 올려진 손과 피부에 닿는 눈길을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는 자 남자가 미웠다. 입속에 예법을 지켜가며 연신 음식을 밀어넣으면서도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도대체 너따위가 뭐길래 나조차 받지 못하던 관심을 한몸에 받는가.

*

비극은 순식간에 휘몰아친다 하던가. 어린 아이의 세계는 아주 섬세한 유리공예와도 같아서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져버리는 모래성과도 같음을 몰랐던 것이 죄일까.

*

방안에는 이미 다 읽은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문의 도서관에는 끝없이 책과 논문이 밀려들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은 들어오는 족족 읽어 치운 후였다. 읽은 책을 다시 보는 것도 질리고 눈을 감고 끝없이 잠을 청하는 것도 질릴 즈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무료함을 지워냈다. 조심스레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것은 나와는 달리 어머니를 닮은 색 옅은 금갈색 머리와 아버지를 닮은 연갈색 눈이었다. 얼굴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조심스레 열린 문을 상처투성이의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어린 아이의 힘이란 참으로 쓸모 없어서 남자의 힘에 손쉽게 밀려버리고 말았다.

"꺅! 무스…!"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콧속으로 매캐한 연기냄새와 비릿한 피냄새가 밀려들었다. 울렁거리는 속에 발버둥 쳤지만 남자는 그것을 무시하며 어린 아이의 얇은 목을 움켜쥐었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너머로 남자가 끝없이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들어왔다. 세상에서 멀어져가는 귓속으로 모라의 비명과 뭔가 터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

눈을 떴을 때, 세상의 온갖 빛이 눈을 비집고 들어왔다.
"맙소사! 아가씨!"
끽끽거리는 모라의 비명이 귀를 긁어내렸다.
"ㅁ…."
성에 차지 않는 목소리가 목을 비틀었다. 놀라 껌벅이는 눈에 조그만 병 하나가 드밀어졌다. 익숙한 글씨가 휘갈겨진 태그를 보며 병을 받아들었다.
"주인어른이 주신 약이예요! 주인어른께 보고해야해요! 그걸 잊다니, 모라는 나쁜 집요정이예요!"
바닥에 머리를 박던 모라가 사라지고 손안에서 구르는 작은 병이 미지근해질 무렵 방안에 이질적인 남자가 나타났다.
"마셔라, 유네라."
차가운 지시에 더듬거리며 약을 마시자 끔찍하게 아프던 목이 편안해졌다.
"쉬도록."
금새 사라져버리는 아버지의 흔적에 아쉬워 병만 하염없이 손안에서 굴렸다.

*

밤이 방안에 넘실거렸다. 지하에서 타고 올라온 것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밤과 뒤섞여 방안에 드리웠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것을 천천히 침대밖으로 나와 마구잡이로 튀는 비명을 쫓아 발을 옮겼다. 마침내 지하로 통하는 문 앞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문을 열 용기가 있어?

문틈을 비집고 아우성치는 것들이 나를 조롱했다. 조심스럽게 민 문은 허무하리만치 부드러이 열렸다. 아래와 뒤에서 어슴프레 흘러나오는 빛을 벗삼아 조심스럽게 도착한 계단의 끝에는 바닥의 본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붉은 강과 추하기 그지없는 비명과 환희가 아롱져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공포를 꾸역꾸역 집어삼키며 두 발로, 그도 모자라 두 손으로 계단을 기어올랐다.

*

붉은 아우라, 오빠라던 사내의 몸에 연결된 줄을 끝없이 타고 들어가던 기괴한 빛의 물약과 고통어린 비명, 그리고 그 반응에 감탄하던 어머니와 담담하게 그것을 기록하던 아버지.

아아…

소녀의 세상이 무너졌다.

*

"왜 그러지, 시오탄트?"
흠뻑 젖은 머리칼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 피부에 닿아오는 조심스러운 온기를 게걸스레 탐하며 그 손에 매달렸다.
"괜찮아? 양호실로…."
"괜찮아요."
괜찮아.
"잠시만…."
꿈이야. 이제는 다시 현실로 기어오르지 못할. 말없이 끌어안아주는 붉은 머리카락 너머로 어지러이 흩어진 양피지들이 휘날렸다.
"이대로…."
괜찮아요. 당신이, 이 온기가 있는 한.
"무섭지 않아."
"응?"
그의 품이 주는 온기가 울어버릴 만큼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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