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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tegory봄길 (1)나그꽃 (0)HQ (69)1차 (57)2차 (19)커미션 (27)시리즈 (14)
SUBJECT . 두가지 안녕
WRITTEN BY . Logann    DATE . 160708

Intro. 그와 그녀

너는 나를 놓았고 나는 너를 놓았다.
아아, 그대여.
영원토록 함께 하자던 우리의 언약은 이토록 볼품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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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 우리."
딱딱하게 굳어진 남자의 입매가 그의 심정을 알려주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눈이 흔들렸다. 미안해. 소리로 내뱉지 못할 사과를 나는 조용히 삼켰다.
"그게, 무슨……?"
"헤어져요. 난 자신 없어. 그러니까 놓아주세요."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오는 목소리가 씁쓸했다. 나오는 말들이 목을 할퀴어댔다. 따갑게 찔러오는 그 쓰라림이 괴로웠다.
"그…그래……. 네가 진짜 원하는 거라면."
남자는 한참이 흐른 후에야 떨리는 입술로 답을 했다. 원하는 답을 받았음에도 즐겁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이브, 소란스러운 연인의 시간에서 우리는 유리되어있었다.
"잘 지내세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의 의자가 나를 붙잡았다. 스쳐지나가며 남자를 눈에 담았다. 고개를 떨군 채 가늘게 어께를 떠는 남자. 안녕. 눈물이 차오르는 눈에 힘을 주곤 카페를 벗어났다. 미안해. 내가 겁쟁이라서.

카페에서 한참 멀어져서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한 슬픔으로 일그러진 목소리가.
"안녕."

그들은 2년이란 긴 시간동안 이어온 인연의 끈을 그렇게 잘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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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사랑했나고 묻는다면, Yes. I love him.
나는 그를 죽을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는 나의 심장이었고 머리였으며 또 하나의 나였습니다.

그녀를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Of course. I love her.
나는 그녀를 온 힘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Sure. We love each other.
서로가 함께함으로서 우리는 진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여기까지 였어요.
One. 홀로서기

너는 내게 참 많은 것을 주고 있었네요.
당신이 차지한 공간이 이토록 큰지 정말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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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대지에 그 찬란함을 뽐내는 시간이었지만 방안은 어둡고 고요했다. 그 숨이 막히는 적막 속에서 휴대폰만이 홀로 빛을 토해냈다. 불룩 튀어나온 이불이 흔들렸다. 숨죽인 울음이 고요 속으로 스며들었다. 재인은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은 데이트의 끝에서 머뭇거리는 남자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기뻐해야할 이야기였지만 재인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이별. 그것은 재인이 줄곧 상상해온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데이트를 마친 그 밤, 재인은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마냥 울었다. 그리고 재인은 결심했다. 이별, 그것은 조용히 다가왔지만 너무도 거대했다.

전화가 왔음을 알리기 위해 끝없이 깜박거리던 휴대폰이 꺼졌다가 다시 환하게 빛을 토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환하게 빛을 뿜어냈다. 주인이 보지 못하는 휴대폰은 조용히 꺼졌다. 이불은 여전히 잘게 흔들렸고 재인은 여전이 슬픔 속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 결정하고 내뱉은 이별이건만 그것은 너무도 무겁고 아프게 다가왔다. 사랑의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두 사람의 취미는 같았고 자주 마주쳤다. 스침은 인연을 만들었고 인연은 두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선물했다. 재인은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처음이지만 정말로 소중한 그런 관계. 갓 소녀의 티를 벗은 재인에게는 육신의 일부와도 같은 그런 관계였다.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간 듯, 잘려나간 인연은 짙은 슬픔을 남기고 사라졌다.

쾅쾅쾅-!
"유재인-! 야, 유재인 문 열어-!!!"
거칠게 흔들리는 기숙사의 문이 아슬아슬했다. 이불속에서 숨죽이던 재인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 앞에 섰다.
"누구……?"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재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야!! 너 아픈 거야?!"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새된 외침에 재인이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안 아파- 그냥 조금 힘들어서. 그냥 가면 안 될까, 혜인아."
"……그래. 먼저 연락하는 거다, 알았지?"
조용한, 뭔가 포기한 듯 물러나주는 혜인이의 말에 주르륵 문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파. 소리가 되지 못 하는 중얼거림이 입속에서 부서졌다. 충동적으로 아프기 싫어서 결정한 이별은 괴로웠다.

-네, 최 현준입니다.
평소와 같은 차분한 음성에 혜인은 잘 손질된 머리칼을 매만졌다.
"저 혜인인데요."
-아…….
"재인이랑 무슨 일 있어요?"
-…….
답이 없는 침묵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현준오빠. 저 장난아니예요."
-글쎄…….
수화기너머의 나지막한 한숨에 혜인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커플이었다. 사귀기 전에도 답답하더니 사귀는 지금도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헤어졌어.
"?!무…무슨 말이예요!"
신경질적인 또각소리를 내던 발이 멈춰버렸다. 땅이 발을 붙잡은 듯 걸을 수가 없었다. 조용하지만 서로를 그만큼 아끼던 커플이 이별이라니. 혜인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음. 미안, 나 유학준비때문에…….
"아, 네.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거친 손짓으로 폰을 집어넣으며 슬쩍 재인의 방을 바라보았다. 죽고 못 살던 커플이 깨졌다니 저 반응이 이해가 됐다. 현준 쪽은 감정을 갈무리하는 타입이고, 재인은 드러내는 쪽이었다. 혜인은 기숙사를 벗어나며 홀로 중얼거렸다.
"얼른 낫길 바래야지."
감정에 서툰 재인이 오랫동안 아프지 않길. 재인을 오랫동안 봐온 혜인이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을 때, 재인은 부스스한 얼굴로 휴대폰을 초기화했다. 그와 찍은 사진들이 들어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얼마 뒤 잠에서 벗어난 재인은 멍하니 휴대폰을 보다가 웃어버렸다.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로 저지른 일이지만 재인은 그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미련덩어리인 자신은 쉽게 포기 못할 추억이니까. 그때부터 재인은 조금씩 손에 걸리는 그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와 나눈 커플링, 그와 마련한 커플 티……. 모두 버리기 아쉬운 것들이었지만 시간은 조금씩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물론 차마 제정신으론 버릴 수 없어 상자 속에 넣어 깊숙이 숨겼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세뇌했다.

방 안의 물건들은 하나 둘 사라졌지만 방 밖의 것들은 어찌할 수 없었다. 캠퍼스 안을 돌아다니면 모든 곳이 그와의 추억이 생각나게 했다. 강의실도, 복도도, 심지어 캠퍼스 안의 거리들까지도. 모든 것이, 들이쉬는 공기마저도 그를 떠올리게 했다. 학식에선 그와 마주앉아 먹던 밥이 떠올랐고, 교내 매점에선 그와 함께 고르던 음료가 재인을 괴롭혔다. 재인에게, 그를 잊고자 발버둥치는 재인에게는 그의 잔재들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Two.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한 걸음

오랫동안 당신을 봐왔어요.
당신의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너무 빛나더라고요.
그런데 요즘 슬퍼 보이시네요.
이별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럼 저가 그 옆에 서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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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최고의 잉꼬커플의 이별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졌다. 그리 크지 않은 학교였던 탓에 교내 인기인이던 그의 출국과, 송별회에 불참한 그의 연인은 모든 이들의 심심한 시간을 때우는 가십거리가 되어주었다. 재인은 그 눈초리들을, 속삭이는 소리들을 담담하게 넘겼다. 아니, 담담하게 넘기는 듯 보였다. 혜인, 재인의 오랜 친구이자 재인의 부모 역을 자처하는 그녀의 눈은 그 모든 것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낙담한 재인도, 재인의 이별을 가십거리로 삼는 모두가 짜증났다. 때문일까, 그녀는 그녀에게 재인의 이별소식을 확인받고자하는 남자들을 괴롭혔다. 얼마지나지않아 남자들은 혜인에게 확인 받는 것을 포기했다. 단아한 미녀로 재인이 유명한 반면 혜인은 마녀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넓은 인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신의 앞에서 꼬리를 마는 남자들만 줄곧 보아온 혜인은 눈앞의 맹랑한 후배의 질문에 짜증보다는 흥미가 치솟았다.

"너 내 소문 못 들은 거니?"
"아뇨, 혜인 선배에 대해서라면 신입생도 다 알걸요?"
어깨를 으쓱이는 후배에 혜인의 눈이 빛났다.
"너 그러고보니 작년에도 나한테 왔었다, 그치? 용건은-"
종이컵에 조금 남은 커피를 홀짝 들이킨 후 입술을 핥은 혜인이 컵을 버렸다.
"재인이가 솔로냐-지? 전에도, 지금도."
"네, 맞아요. 혜인 선밴 재인 선배의 베프라고 들었어요."
"흐응~"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커피를 한 잔 더 뽑은 혜인이 그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김 영우. 그녀가 알기론 굉장히 유명한 남자였다. 깔끔한 마스크에 몸에 베여있는 배려심, 그리고 뭣보다.
"여자한테 관심 없는 줄 알던데, 다들."
"일편단심 형이라서요, 저는."
혜인은 눈앞의 맹랑한 후배가 마음에 들었다.

재인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안 볼래."
"혜인 선배가 꼭 재인 선배랑 이거 보고 감상문 써오랬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혜인 선배 성격 아시잖아요!"
"아니, 원래 혜인이랑 보려던 영화고-!"
"재인 선배가 선호하는 자리의 표, 선호하는 음료까지 사놨어요. 진짜 저 안보면 혜인 선배한테 죽어요."
허리까지 숙여가며 부탁하는 남자의 모습에 재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혜인이 뭐 때문에 이러는진 모르지만 이 후배의 말이 사실이라면, 불똥은 자신에게까지 튈 것이 분명했다.
"알았어. 에휴."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선배."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도록 해주는 후배의 모습에 그가 겹쳐졌다.
"선배?"
"아, 응. 고마워."

재인은 눈앞에서 빙글거리는 후배의 모습에 머리를 잡았다.
"정말-! 혜인이는 무슨 생각인거야!"
날카로운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후배가 머리를 긁적였다.
"전부터 왜 이러냐구! 약속하곤 펑크 내고, 널 보내고!!"
재인은 거칠게 휴대폰을 꺼냈다. 이해가 되질 안았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눈앞의 저 후배, 김 영우를 계속 저 대신 약속장소에 보내는 것이다. 그까지 협박해가면서!
"야-! 혜인! 정 혜인!! 무슨 생…야? 야!!"
끊겨버린 전화에 화를 내면서 재인이 영우를 쏘아보았다.
"너도 그래! 싫으면 싫……."
"안 싫어요. 사실 이거 저가 부탁한 거예요."
"뭐…뭐?"
그녀의 말을 자르고 나온 말에 재인은 당황했다.
"저요, 재인 선배 좋아해요. 저랑 사귀실래요?"
상상도 하지 않은 순간, 뜬금없이 다가온 고백에 재인은 뒤도 안보고 도망쳐 버렸다.


기숙사 방문을 열자 혜인이가 보였다. 책상에 앉아 과자를 먹다 고개를 돌려 인사해왔다.
"여!"
"너..너!!"
화가 나서 파르르 떠는 재인을 보며 혜인이 입에 물고 있던 빼빼로를 오도독 씹었다.
"데이트는 잘 했니? 아, 지금 온 걸 보니 안했구만. 왜 고백이라도 하디?"
빼빼로를 먹으며 장난스레 말하는 혜인의 모습에 재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왜 이런 거야?! 내가 소개시켜 달랬어? 내가-!!"
"너 맨날 한숨 푹푹 쉬고 다녀. 그거 거슬린다고. 그래서 내가 괜찮은 애로 소개팅한거잖아. 온통 우울해요~ 광고하고 요즘 쓰는 동화도 다 어둑어둑해서 맨날 욕먹고. 네가 걱정……."
"지나친 참견이야!! 나 아직-!"
"그래, 현준 오빠 아직 못 잊었다고? 혹시 아니, 걔를 만나다 보면 마음이 떠날지. 걔 다 알고 있는 애야. 작년부터 너 쫓아다니던 애라고.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일 저지르는 사람이니? 나도 다 알아보고 괜찮으니까 들이민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혜인이 문을 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난 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재인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내게 뭘 원하는 건데."
작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졌다.


Three. 되돌아가다

미안해요. 아직은 그 사람이 너무 크네요.
그래도 정말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담담하게 돌아볼 수 있어요.
기원할게요.
당신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나에게 그 사람이 소중한 것처럼,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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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는, 그러니까 혜인이 고심해서 골랐다는 그는 끈질겼다. 계속 나타나서는 끝없이 고백했다. 재인은 그때마다 거절했고, 그는 어깨가 축 처져서는 돌아갔다.
"밖에 비와요, 선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재인이 몸을 돌렸다.
"너 강의 없니? 왜 계속-"
짜증어린 재인의 말은 눈앞에 내밀어지는 우산에 멈춰버렸다.
"그거 쓰고 가세요. 그리고 그렇게 화내지마시구요. 선배는 웃는 게 예쁘니까."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가 빗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보면서 재인이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둘 다 너무 닮았잖아."
우산을 펴며 바라본 하늘은 검고 슬펐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두 사람이 닮은 것은 아니었다. 생김새도, 말투도, 분위기도 달랐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배려심이 있었다. 그래, 배려심. 어쩌면 아직 어린 재인은 그 배려라는 것에 매혹당해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는 사람을 생각의 늪으로 빠뜨렸다. 멍하니 시야에 들어오는 캠퍼스안의 거리가 왠지 이전과 달랐다. 늘 활기차 보이던 거리는 죽어있었다. 재인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Rrrrr..Rrrrr
"네, 유 재인입니다."
-어, 재인아.
"..혜인?"
-비오는 데 우산 있어?
갑자기 묵직하게 존재감을 알려오는 우산이 거슬렸다.
-재인아, 비 꽤..
"있어."
-아, 그래? 너 그때 일로 삐진 거 아직ㄷ..
"있지, 혜인아. 나 오빠가 아직 좋아. 그런데 그 후배랑 만나는 건 그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 아닐까?"
-…….
전화기 너머의 침묵이 빗소리에 가려졌다. 그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용하는 거잖아.
"혜인아, 네가 날 엄청 생각하는 거 알고 있는데 이번은 아닌 것 같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내 힘으로."
-힘들 거야. 알고 있어?
"그런데- 오빠는 더 힘들지 않을까."
-멍청하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몰라. 굴러 들어온 복을 차낸 모자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내가…내가 오빠를 버려서 듣는 말이라면, 충분히 들을 만하지 않아?"
-난 모르겠다. 후, 그럼. 그 후배는 네가 직접 거절해. 난 더 이상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응…늘 고마워하고 있어, 혜인아."
-어휴, 나도 몰라.

"어, 선배."
"많이 기다렸어?"
후배, 영우는 웃고 있었다. 미안할 정도로 밝게,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선배가 먼저 불러주신건데~ 이정도야!"
"음-일단 이거, 빌린 우산. 고마웠어."
"아, 감기같은건 안 걸리셨죠?"
우산을 받아드는 영우의 눈에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 눈동자에 그가 겹쳐졌다.
"안 걸렸어. 그리고 그, 고백.. 말인데."
"아……."
걱정이 담겨있던 눈에 긴장이 파고들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심호흡을 하자 영우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잠깐만요. 후아, 그거 꼭 지금 들어야해요?"
"응. 꼭 들어줬으면 좋겠어."
영우가 연신 얼굴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담담함을 가장한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난 그를 잊지 못해. 아마 불가능할거야. 그가 정말 좋아."
"절 방패로 삼아도 괜찮아요. 저가 잊ㄱ……."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난 그가 정말 좋아! 벌써 반년이 흘러가고 있는데도 이 두근거림은 사라질 않아!"
새된, 그러나 필사적인 외침에 영우가 입을 다물었다.
"알아주길 바래서. 아마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난 응해 줄 수가 없어. 오직 그 뿐이야. 네가 좋은 애란 것도 알지만 정말.. 난 보답할 수도 없고. 하아.. 그러니까……."
"거절이신거죠?"
"에?"
멍청한 나의 반응에 그가  풋하고 웃었다.
"괜찮아요, 선배. 미안해하지도 마시구요. 솔직히 우리학교 사람들 중에 선배들이 그렇게 서로를 아낀 거 누가 몰라요."
머리를 긁적이는 그가 어쩐지 슬퍼보였다.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부담이 되고 싶었던 거 아니까요. 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요. 힘들 땐 얼마든지 연락하세요. 언제든 달려갈게요, 선배!"
"응, 고마워. 진짜 고마워……."
"에이~ 울지 말고요, 선배. 이쁜얼굴 망가져요."
머리위에 내려앉는 손이 미치도록 따뜻했다.


Four. 고민

뭐가 달랐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아.
그 사람은, 그 사람과 같은 두근거림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그건 확신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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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물들인 어둠이 빠르게 물러갔다. 시간은 흐르는 강물과 같이 흘러갔고 세상은 더없이 빛났다. 그와 그. 재인의 연필이 두 사람을 그려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고 눈매가 순했다. 한 사람은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지만 개성 넘쳤고 눈매에는 장난끼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한참 손을 움직이던 재인은 두 사람 사이에 '배려'라는 단어를 적어 넣었다. 두 사람은 배려심이 넘쳤다. 이별을, 그리고 거절을 고하던 그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비슷했다. 혹여 재인이 상처받을까, 그들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눌러 담았다. 재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연필이 종이 위를 가로질렀다.
"두 사람은 너무 닮았어. 그래서야……."
두 팔에 얼굴을 파묻은 재인은 지쳐보였다. 시간이 아무리 지났다고 하더라도, 성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재인은 아직 어렸다.

혜인은 손톱을 정리하면서 세 사람을 떠올렸다. 유재인. 그녀는 너무도 연약했다. 때론 짜증날 만큼, 재수가 없어서 폭언을 퍼부어주고 싶을 정도로 순진했다. 순수와 멍청은 한끝차이라던가. 혜인은 거칠게 매니큐어를 닦아냈다.
"그래도……."
분명이 두려움이리라. 혜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두 사람의 이별의 원인을 짐작했다. 재인은 굉장히 부드러운 성품이었고, 겁쟁이였다. 그리고 멍청하리만큼 자신을 챙기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 남이 아프길 바라지 않는 마음, 그것이 자신을 아프게 할지라도 감수하려는 마음. 최 준현. 그는 어리석은 남자였다. 의심 따위 할 줄 모르는. 아니 그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부드러운 분위기, 상대를 믿는다면 상대가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리라고 믿는 신념. 그를 속이려고 다가온 사람들조차,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사람들조차 무장 해제시키는 특유의 분위기는 무지막지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재인이 거짓말을 할 거라곤 상상을 못했을 거였다. 김 영우. 들리기로는 장난꾸러기지만 기댈만한 사람. 책임감도 넘쳐나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안다. 악동에 가깝지만 밉지 않은 사람. 나도 모르게 호감을 표하게 되는 그런 사람.
"하지만 재인 이는……."
김 영우, 그 아이보다는 최 현준, 그 사람과 있을 때 빛이 났다.
"그는 잊어버렸을까, 아니면 기억하고 있을까."
혜인의 눈이 빛났다. 듣기로는 2년으로 계획하고 떠난 유학이라고 했다. 아마 지금도 같을 터였다. 그렇다면 6개월. 그 후엔 그가 돌아온다. 아무런 생각 없이 기간을 꼽아본 혜인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이년의 사랑. 그리고 2년의 그리움. 그 끝은 뭘까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혜인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슬슬 유 재인의 보모 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네."
휴대폰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는 혜인의 뒷모습이 후련해 보였다.

재인은 책장에서 노트 하나를 꺼냈다. 다른 노트들과는 다르게 표지가 텅 비어있는 노트는 오래되어 보였다. 파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넘어갔다. 중간에 멈춰버린 동화책. 그와의 기념일에 같이 보려던 것이었다. 엔딩이 나지 않은 동화는 엔딩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인은 동화를 다시 읽으며 연필을 들어 그림들을 고쳐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손이 멈췄다.
"원래는 어떤 엔딩이었더라……."
일 년하고도 반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길었나보다. 재인은 흘러내리는 눈물이 노트를 망가트릴까싶어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정해놨을게 분명한 엔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오빠는 어때요? 행복해요?]
한국의 부모님과 계속 통화하던 현준은 갑자기 빛나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준아?
"아…아아. 네, 어머니."
-그래서 카페 이름은 정했니? 인테리어야 네가 보내준 그림을 바탕으로 만들 수 있다지만…가게 이름은…….
"네, 정했어요. 어머니."
-그래, 뭐니? 알아야 간판을 만들지.
전화기 너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현준이 입을 열었다.
"oiseau bleu. 파랑새…요."
-예쁜 이름이로구나.
"그렇죠?"


Five. 다시 만난 이어짐

반가워. 너는 여전하구나.
좋아하는 것도, 습관도 여전하네.
조금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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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에 카페 하나가 생겼다. 디저트 카페라는 소문이 도는 카페는 아기자기한, 동화 같은 외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카페의 디저트들이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 소문이 났을 때 즈음, 학교의 여자애들은 요란떨기 바빴다. 여자애들 사이에 카페의 주인이 현준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먹이를 낚아채는 매같이 그 정보를 낚아챈 혜인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카페를 찾아갔다. 언젠가 보았던 디자인에 흥하고 콧방귀를 끼곤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만이네요, 현준 오빠."
"아- 오랫만이네, 혜인아."
2년 전과 같이 완벽하게 정돈된 모습으로 서있는 그녀를 보며 현준이 슬쩍 이마를 닦았다. 그런 행동을 눈치 챈 혜인이 흥하고 콧방귀를 끼곤 고개를 돌렸다.
"카페 인테리어가 참 ~ 좋네요."
"아, 그렇지?"
기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그를 보며 재인이 핏하고 웃어버렸다.
"헤어진 여자 친구의 디자인이 그렇게 좋나봐요? 카페 이름도 파랑새던데. 유 재인이나 현준 오빠나 한심해서 정말.“
틱틱거리는 그녀의 말에 현준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혜인이는 변한 게 없네. 그 독설도. 그런데 재인이가 왜?”
“와아- 지금 걱정된다 이거죠??? 푸. 왜긴 왜예요. 그 녀석도 삽질중인걸요. 소개팅을 해줘도 차질 않나. 두 사람 진짜 민폐라니까요.”
혜인의 말에 얼굴이 굳었다가 펴진 현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인이, 아직도 혼자인…거야?”

재인은 천천히 몇 번이고 동화를 읽었다. 그래도 기억나지 않는 엔딩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히 정했던 엔딩이다. 현준의 생일, 12월 29일에 함께 보려고 했던 동화이고 작업이 멈춘 것은……. 재인은 입술을 꾹 깨물곤 연필을 내려놓았다. 고민한다고 해서 쉽게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Rrrrr…Rrrrr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에 깜짝 놀란 재인이 전화를 받자 바로 혜인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재인아~ 여기 학교 앞에 새로 생긴 카페에 디저트 엄청 맛있다~ 지금 할 일 없음 가 봐. 아 그리고 나 내일 강의 안 들어가. 교수님이 나 찾으면 적당히 둘러대 줘.
용건만 말하고 끊어버리는 혜인에 재인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공책을 집어 들었다. 2년. 무려 2년이나 엔딩이 미뤄진 동화책이 불쌍했다.
“혜인이가 추천한 카페에 가서 마저 해볼까…….”

혼자 카페에서 한참 디저트를 만들던 현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하냐. 최 현준.”
“어, 형. 빨리 왔네.”
“혜인이가 빨리 가라던데. 근데 그 계집애는 내가 여기서 알바뛰는거 어떻게 알았대냐? 아주 날 죽이려고 난리를 치던데.”
옷을 갈아입으면서 툴툴대는 그를 보며 현준이 피식 웃었다.
“글쎄. 왔다 가긴 했는데…….”
현준은 다시 일어나 반죽을 만지다가 손님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형. 손님.”
“어어, 나간다.”


Outro. 다시 안녕

나는 너를 잡았고, 너는 나를 잡았다.
먼 길을 되돌아와 우리의 인연은 이어졌구나.
아아, 이토록 서로가 소중한 것을…….
우리는 너무도 먼 길을 돌아 알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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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초콜릿 시폰 케이크랑 녹차 라떼로 주세요."
주문을 하면서 이리저리 살펴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없는 건가 생각하면서도 아쉽다고 생각했다.
"드시고 가시겠어요?"
종업원의 질문에 후다닥 돈을 지불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별을 선언한 주제에 참 경우 없다는 생각에 입안이 씁쓸했다. 조심스럽게 창가 쪽의 테이블에 앉아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글과 그림으로 꾸며진 공책을 보면서 연필을 집어 들었다. 재인은 엔딩이 기억나지 않는 동화는 미뤄두고 마감이 코앞인 것부터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계속 눈에 걸리던 삽화를 조금씩 수정하면서 동화를 완성해가기 시작했다. 벌써 두권째 쓰고 있는 동화는 차분했다. 밝지도 순수하지도 않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그런 동화들. 언제부턴가 그런 동화들만 쓰고 있었다. 형태가 잡혀가는 삽화를 확인하곤 슬쩍 연필을 놓았다.
"여기 주문하신 것 나왔습니다."
"어?"
"벨이 울리는 데도 안 오셔서 손님도 없고, 그래서 가져왔어요."
예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깜박이다 감사를 전하고 천천히 포크를 들다가 멈칫했다.
밀푀유.
"저기 케이크가 잘못……."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아버렸다.
"아……."
"안녕, 재인아. 잘……지냈니?"
눈가를 긁적이는 그가 눈앞에 서있었다. 난처할 때면 나오던 그의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변함이 없는 그의 행동이 반가웠다.
"으응-오빠, 는?"
부드러운 그의 미소가 반가웠다.
"나도 그럭저럭. 시폰 먹지 말고 이거 먹어."
"음-밀푀유?"
"기억하네?"
"오빠가 처음 만들어준 디저트인걸."
쑥스러운 기분에 애꿎은 밀푀유만 계속 찔렀다.
"있지, 재인아."
그의 말에 눈을 공책에서 떼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있지, 아직 난 너를 포기하지 못하겠어서-혹시."
살짝 숨을 들이쉰 그가 입을 열었다.
"다시 내 사람이 되어줄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4년 전으로 되돌아간 기분. 미묘하게 간질거려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응-"
창밖에 떨어지는 벚꽃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서로 얼굴을 붉히던 중에 갑자기 노트를 하나 꺼내는 재인의 모습에 현준이 웃어버렸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어른스러워 진 것 같았다.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에 씁쓸했지만 그녀가 채워나가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뭐야?”
“음- 오빠 생일 선물로 주려던 동화. 오빠 동화 ‘파랑새’ 좋아하잖아. 그래서 그거에 가지고 우리의 이야기를 그려봤어. 파랑새라는 것은 우리의 곁에 있는 그런 것이니까, 우리의 행복은 늘 주변에 있는 거야. 원작 동화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더 많지만 나는 그것만 담았어. 오빠가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그게 파랑새가 가지는 의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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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를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It was little happy. But I'm sorry.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I was happy. And I love her.

그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Of course, I love him.
그는 제게 있어 빛과도 같았어요. 이별하고 나서 그것을 알아챘죠.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Yes. I love her.
그녀는 제게 있어 영감의 원천이었어요. 홀로 공부하면서 깨달았어요.

우리의 시간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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