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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신과 마법사] 천년을 기다린 약속
WRITTEN BY . Logann    DATE . 160708

Ⅰ.

어둠 속에 원형으로 배치된 열여섯 개의 의자가 빛을 흘렸다. 어둠 속에 그저 존재할 뿐이던 의자들 위로 하나둘씩 색색의 문양이 떠올랐다. 갈색 여우 얼굴 문양, 하얀색 시계를 밝고선 고양이 문양 등 총 17개의 문양이 저마다의 색을 밝히자 의자들로 그려진 원형의 중심에 하나의 인영이 솟아올랐다.

“「세계」여. 우리를 왜 불렀나요?”
눈시울이 붉은 소녀 껴안고 있는 연하늘 머리칼의 소녀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대, 나유리스. 온유한 미풍의 쌍둥이 여신이여.
윙윙거리는 목소리에 나유리스의 품 안에 있던 소녀가 몸을 떨었다.
“불길해…….”
-그대의 혜안은 날이 갈수록 뛰어나지는군. 나헬리스, 온유한 미풍의 쌍둥이 여신이여.
“말장난은 그만하지, 「세계」여.”
-카라온, 신중한 중도의 신이여. 아직 '그'가 오지 않았네만.
후드를 눌러쓴 「세계」가 빛을 흘리지 않는 문양을 가리켰다.
“그는 오지 않는다. 용건을 말해라, 「세계」.”
-……. 좋소.

                                          ℘

‘기가 뒤틀렸다?'
고고하게 흐르기만 하는 기가 거칠게 움직였다. 영역 밖의 기가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오싹한 기세에 등 뒤가 싸한 것을 느끼며 남자가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었다.

“왜 그러세요?”
고운 목소리가 의문을 담고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울림이 허공에 퍼짐과 동시에 다시 기가 이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
‘방!'
무의식적으로 휘둘러진 부채에서 튀어 나간 주술이 소녀를 둘러쌌다. 주술에 튕겨 나간 난폭한 기가 고요로 되돌아갔다.
‘이상하군. 기가 어째서…….'
“왜 그러세요, 주술사님……. 눈도 무섭게 뜨시고…….”
주저하는 소녀의 목소리에 남자가 상념을 떨치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날카롭게 날이 선 그의 감각은 다시 소녀의 주변을 맴도는 기를 쫓고 있었다.

‘주술을 더 쓰지 않고 보호막을 유지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남자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와 비슷한 주술사들의 입지는 턱없이 좁았다. 본래 사특하고 간악한 사술과 엄연히 다르나 세간의 인식에서는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 소녀가 저와 함께 있다 다친다면 사술에 밀리고 나라에서 그 존재를 부정당하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주술사들에게 큰 타격이리라.

“혜화. 마을로 뛰어가.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아슬아슬하게 마을까지는 가능하겠군.'
기는 남자를 노리지 않았다. 오직 소녀만을 노리고 있었다.
“네?! 하지만!!”
반발하는 소녀를 보는 남자의 표정이 와작 구겨졌다.
“멍청한!! 돌아가라! 다시 연통을 넣겠다!”
서슬 퍼런 남자의 일갈에 소녀가 머뭇대다 몸을 돌렸다.
“꼭…약조하셨습니다!”
다시금 이를 드러낸 기가 혜화에게 달려들었지만, 소녀를 깨물기도 전에 보호막에 튕겨 나가떨어졌다. 언덕에서 마을로 내달리는 소녀를 보며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해도 지나치게 이상했다.'
“좋지 않아…….”
“뭐가 좋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사형?”
아무도 없는 허공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남자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세계의 중간이 그리도 좋은가, 사제?”
“하하. 그럴리가요.”
허공에 균열이 가더니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시커먼 공간이 균열 너머에서 탐욕스레 입을 벌렸다. 어느 정도 균열이 커지자 새하얀 손이 튀어나와 부서지고 있는 균열의 경계를 움켜쥐었다.
“언제 봐도 악취미로군.”
“하하.”

새하얀 손이 잘게 떨리더니 말쑥한 선비의 얼굴이 시커먼 공간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악취미라뇨. 아직 미숙할 뿐입니다.”
“그럼 더욱 정진하도록.”
퉁명스레 내뱉는 남자를 보며 균열 밖으로 나온 선비가 옷을 툭툭 털며 허허롭게 웃었다.
“예예. 더욱 정진해야 하고말고요. 그나저나 무엇이 이상하단 말씀이 시온지?”
비뚤어진 갓을 만지작거리며 의복을 단정히 정리하던 선비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기'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노리더구나. ‘기'가 의지를 갖추고 행동하는 것이었더냐?”
“예……? ‘기'가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고히 흘러갈 뿐인 것이 아니었습니까?”
구겨지는 남자의 표정에 선비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되묻자 남자가 한숨을 쉬며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말이다. 그보다 넌 여기 왜 온 게냐. 스승님과 함께 있던 것이 아니었나?”
“예? 아…아, 예! 스승님께서 모두 모이라고 하시었습니다. 알릴 것이 있다, 그리 말씀하시더군요.”
선비가 뺨을 긁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알았다, 열거라.”

                                      ℘

“아…….”
잠에 한발 걸치고 있는 소년의 눈이 탁했다.
“야, 정유학. 수학이 너 교무실로 오란다.”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들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한예윤…….'
멍하니 이름표를 읽던 유학이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손을 들어올렸다.

“아?”
“아가 뭐냐 아가. 우리 반 차례 되기 전에 얼른 갔다 와. 왜 수학 시간에 자고 난리냐, 난리가.”
유학의 머리를 굵디굵은 참고서로 내려친 예윤이 한숨 쉬며 유학을 타박했다.
“어…아…그래.”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학을 보며 예윤이가 입을 열었다.
“야, 우리 반 4등이야. 지금 2반 먹고 있으니까 10분 후면 우리 반이라고. 빨랑 안 오면 너 내다 버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나온 유학은 아릿하게 고통이 남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매일 이어지는 꿈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꿈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다. 부챗살을 까만색으로 물들인 부채를 쥐고 휘두르면 날카로운 바람이 부채에서 쏟아지고 불덩이가 튀어 나갔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기묘한 것들을 사냥하기도 하고 때론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주기도 했다. 그리고…….
“혜화.”
그 작은 소녀와 자주 만났다. 때론 우는 아이를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피리도 불어주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도 날이 저물기 전에 마을로 돌려보냈다. 절대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났다.
“연인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뭐가 연인이 아니야?”
머리에 내리꽂히는 딱딱한 물체에 유학이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자 콧방귀를 낀 남자가 그대로 한대 더 후려쳤다.
“이놈아. 정신을 어따 빼놓고 있었기에 2교시부터 4교시까지 내리 자냐. 응?”
“악! 악! 악! 수학쌤 그만 때리-악!”
유학이 비명을 질러대자 교무실에서 나온 남자가 부드럽게 파일을 뺏어 들었다.
“하하하, 정쌤. 제일 걱정한 건 정쌤이면서 유학이 그만 때려요. 유학이 너도 아프면 보건실가지 왜 불편하게 교실에서 자고 그래.”
남자의 말에 유학이 머리를 매만지다가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았다.
“국어쌤…제가 2교시부터 잤어요……?”
“어? 응, 너 내 시간부터 자던데? 아픈 건가 보다 해서 깨우진 않았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학의 모습에 남자가 답하자 유학은 더 혼란스러운 듯 머뭇거렸다.
“어…전, 기억이 없어요. 분명히 1교시에 영어 듣고 2교시에…어……?”
어지러워지는 머리에 유학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불안정한 그의 모습에 두 선생님이 시선을 교환하며 유학을 일으켜 세웠다.
“일단, 많이 안 좋아 보이니까 양호실에 갔다가 병……?!”
선생님들이 한 발 내딛자마자 유학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어…정쌤!! 유학이 좀 바닥에- 신쌤!!! 양호실에 전화 좀 해주세요!!!”
점심시간의 학교가 소란으로 휩싸였다.


Ⅱ.

“그게 무슨 말이야?”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금발 머리칼의 소년이 되물었다.
-오, 해맑은 광명의 라할이여. 말 그대로라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하늘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여인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광대처럼 두 팔을 하늘로 벌리며 알 수 없는 색의 거적을 뒤집어쓴 세계가 킬킬거렸다.
-왜 말이 안 된다 생각하오, 광폭한 대기의 리유나여!
모두가 침묵에 잠기자 세계가 두 팔을 갈무리하며 뒤돌아섰다.
-나의 결정은 바뀌지 않소. 당신들의 아이들은 예외로 하겠소이다. 그들은 아직 나의 규율 속에 숨 쉬고 있더군.
“세계여. 그대는 시험도 없이 인간을 당신의 안에서 내치겠다는 건가요? 그것은 당신의 규율에서 어긋난 것이 아닌가요?”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부드럽게 말하자 세계가 고개를 저었다.
-줄거요, 기회. 규율에서 벗어났더라도 기회는 주어야지. 힘내보시오. 그대들의 아이들, 계약자 혹은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들을 통해 말이오.
세계가 사라지자 무거운 침묵 속에 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신중한 그의 푸른 눈이 차갑게 빛났다.
“모두 일어나지. 세계가 우리에게까지 통보했다면 어쩔 수 없어. 모두 오랫동안, 그 먼 옛날 우리가 처음 인간과 계약했을 때를 기억하나?”
“천 년 전을 말하는 건가?”
잿빛 머리를 가진 여인이 잿빛 눈을 가늘게 뜨며 속삭였다.
“그래. 우리는 그날 인간 세상에 발자국을 찍으며 맹세하지 않았나. 이제 움직이지. 더 늦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그들을 잃을 수는 없지 않나.”

                                      ℘

‘모두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기와 포악해져 가는 인간들, 그리고 도태되어가고 있는 우리를 말이다.'
스승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얼마 전, 서방의 주술을 이어가는 이들이 방문했었다. 그들 또한 우리가 마주한 문제에 직면한 상태더구나. 그리고 16명의 「신」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들과 「계약」을 요구하더구나. 서방의 자들은 그것에 동의했다. 허나 나는 너희와 상의할 일이라고 판단하여 너희를 모두 모았느니라.'
항상 조심스러운 스승이 더욱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다. 좋다고 생각한다. 「신」들은 계약이 단순히 그들 아래에 귀속되는 것만이 아니라 하더구나. 너희 모두를 이끌어야 하는 나의 입장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을 지닌 우리에게 「신」이라는 보호막은 상당히 유용할 듯싶었단다. 그들이 우리를 직접 박해 속에서 구원하지 못할 지라도.'
말을 멈추며 가만히 숨을 가다듬던 스승이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은 우리가 환생하고 또 환생하며 인생의 어느 순간 그들과 계약을 맺어 전생을 각성하고 그들의 가호 아래 인간들을 도울 것을 요구했다.'
스승이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자 사형이 입을 열었다.
‘지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저희의 힘이 닿는 대로 인간을 돕고 있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너희도 알고 있지 않으냐? 우리의 이 근원 모를 힘은 마구 뛰어 나와 친지가 너희를 귀신들린 아이라 손가락질하며 버리거나 가두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을 막아주겠다고 했느니라!'
절규에 가까운 스승의 말에 무릎 꿇고 앉아있던 이들이 몸을 떨었다.
‘우리가 영혼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이 힘을, 그들과 다시 「계약을 갱신하는 순간」까지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주겠다 했다는 말이다! 나는! 어린 것들이 부모를 찾으며 울부짖는 것을 더는 보기 싫구나!'
시뻘게진 눈을 치켜뜨던 스승이 결국 눈물을 흘렸다.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을 때 「계약」을 하겠노라 약조했다. 나는 믿고 싶구나. 그리고 바란다. 저 어린 것들이…….'
스승의 눈이 아무것도 모르고 밖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들에게 닿았다.
‘스스로 힘을,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저주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구나.'
‘하시지요.'
내 목소리가 갈라진 듯했다.
‘하시지요, 스승님.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태어남을 거듭하며 사람을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 대가로 그들은 우리의 힘을, 분별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숨겨주겠다-한 것이고요. 저희가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서방으로 가달라고 했다.'
기운 없는 스승의 목소리에 다른 자가 입을 열었다.
‘가겠습니다. 어디나 사람은 살 테고, 저 또한 스승님께서 이리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합니다. 하시지요, 스승님. 사형들, 사제들 모두 동의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하시지요, 스승님.'
모두의 말에 스승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맙구나.'
“예서 뭐하십니까, 사형?”
“사제.”
아까 전 있었던 회동에 대한 생각을 머리 한편에 밀어두고 눈을 떴다.
“예?”
“그림 그리는 도구 좀 빌려주겠는가?”
“예? 아아, 얼마든지 쓰시지요.”
사제를 쫓아 그의 작업실로 들어가자 수많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한데 무얼 하시려고……?”
말없이 부채를 펴고 붓을 잡자 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붓이 움직이고 비어있던 부채 한 면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 사형, 보호의 진을 짜 넣으시는 겁니까?”
“…그래.”
“어찌하여 말입니까? 보통은 공격의 진을 짜 넣지 않습니까.”
“줄 사람이 있다. 내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문이나 열어다오.”
붓을 내려놓고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붓 쪽으로 살짝 부치자 주술이 튀어 나가 붓을 감싸 안았다.
“다 열었습니다. 문은 유지하고 있을까요?”
“그래 다오.”
문 너머로 몸을 날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별이 눈이 시리도록 박혀 들었다.

‘서방으로 간다.'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는 채로 서방으로 간다니 이해도 되지 않는 요구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 아무리 한탄해도 변치 않을 것을 알기에 한숨을 푹 내쉬며 땅을 박찼다. 주술이 담긴 다리는 손쉽게 병사들이 경계하는 벽을 넘어 마을 안에 닿았다. 밤이 깊어지고 있는 터라 성벽에서 밖을 경계하는 병사 몇을 빼곤 인적 하나 없는 마을의 그림자 속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뉘…뉘십니까?!”
어느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빛에 그림자가 방 안으로 들어갔는지 깜짝 놀라 소리치는 목소리에 실없이 웃음이 흘렀다.
“주…주술사님?!”
문이 살짝 열곤 고개를 내미는 혜화의 얼굴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아직 잠들지 않았던 것인지 잠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오밤중에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주술사님. 제대로 맞이하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부끄러운 듯 우물대는 모습에 웃으며 부채를 내밀었다.
“괜찮다. 밤중에 온 내가 잘못된 것이지. 하지만 말이다, 내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 무례를 범했구나.”
“괜찮다,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없으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의문으로 가득 차 물어오는 얼굴에 작게 미소 지으며 부채를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이것을 맡겨두마.”
“네?!”
“내 서방으로 가게 되었다. 언제 올지 모르나 내 꼭 다시 들릴 터이니 그때 그것을 돌려다오. 잡귀에 잘 씌는 너를 나대신 도와 줄 것이니라.”
“주술사님이 지켜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처럼 말이지요. 그리는 안 되는 건가요?”
“우리가 모두 움직이는 것이다. 나만 빠질 수는 없고, 가능하다고 해서 빠질 수 있는 일도 아니구나.”
체념한 듯 조르는 것을 멈추고 부채를 받아드는 혜화를 보며 웃자 바
로 심통 난 얼굴을 하곤 문을 쾅 닫아버린다.
“약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제가 꼭 지키고 있을 테니.”
“그래. 부탁하마.”
다시 허공을 밟기 위해 땅을 박차자 삐걱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위험한 일 하지 마세요.”
걱정이 담긴 혜화의 목소리에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오셨습니까?”
“오냐.”
균열 앞에서 노닥거리다 벌떡 일어나는 모양새에 피식 웃음을 흘리자 냉큼 옆에 붙어 질문을 쏟아냈다.
“정표입니까? 예?”
“정표는 무슨 정표더냐. 가자.”
“아,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주시지요.”

                                      ℘

“…….”
묘하게 눈꺼풀이 뻑뻑해 연신 감았다가 뜨는데 병원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천천히 명확해져 가는 시야 한구석으로 희끗희끗한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 거지?’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을 더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후…이리 오너라, 혜화.”
복잡한 기분에 창밖의 새까만 하늘을 힐끗거리며 중얼거리자 그저 희끗희끗하기만 하던 것이 천천히 형태를 잡아갔다. 단정한 검은 머리와 고운 옷자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돌아가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저야말로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행동에 유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넌 변치 않았구나. 하지만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마라. 내게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단다.”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이 부채를 어머니께 들켰거든요. 주술사님이 기묘한 힘을 지녀 집안에서 쫓겨날 때, 할머니께서 겨우겨우 손에 들려 보낸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우셨어요. 이다지도 모진 누이였는데, 동생 하나 지켜내지 못한 못난 누이였는데 동생은 당신의 딸을 이토록 열심히 지키고 있었구나, 그리 슬피 우셨습니다.

“누이의 잘못이 아니란다. 내가 겨우 일곱 살이었으니 누이는 겨우 열 살이었어. 열 살짜리 여아가 누구를 지킬 수 있겠느냐. 그 어리던 누이가 집안 어른들의 결정을 어찌 뒤집을 수 있었을꼬. 그저 두려움에 떠는 것이 고작이었지.”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다, 혜화야. 내 그리 집에서 쫓겨났지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리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 절규하는 어머니와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으면서도 지켜주지 못한다는 억울함에 펑펑 울던 누이를 기억한다. 그런 누이의 딸을 지키는 것이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자, 이만 부채를 돌려주고 쉬려무나. 부채에 담긴 나의 힘 때문에 지금까지 쉬지도 못하고 그 긴긴 세월을 지나왔을 텐데. 이만큼이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더 빨리 돌려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니라 하지 않았니.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단다.”
-하지만 늘 알 수 없는 기묘한 것이 저를 막아서…….

부채를 건네주기 무섭게 흩어져버리는 혜화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전생에 불과하지만, 지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미안해하고 괴로워했을 누이가 눈에 밟혀 가슴을 부여잡았다. 뒤늦게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변하는 것은 없는데도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한번 만나지 못한 것이 가슴을 짓눌렀다.

“미안해요, 누님. 제가 겁쟁이라 미안해요, 누님. 누님한테 부정당하면 어쩌나 무서워서…혜화만 겨우 보았습니다, 누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너무도 괴로웠다.


Ⅲ.

-환영한다.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짓씹는 유학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또다시 이 천형과도 같은 힘을 짊어지게 된 것? 또다시 무의미하게 피를 흩뿌리며 고독을 짓씹어야 하는 것? 누군가가 이토록 사무치게 나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하는 것을요? 도대체 무엇을 환영한다는 말입니까!”

유학이 허공에서 빛나는 녹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노려보며 소리를 지르자 그가 미소 지었다.

-그 부채에 미련을 담아두었다니. 그러니 그리 쉽게 죽은 것이다. 그 멀고 먼 거리를 넘어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데 어찌 너 자신을 보전할까. 네가 버려질 때 입도 뻥긋 못한 누이의 딸을 지키기위해서 말이다. 어느 누가 그리 추측할 수 있었을까, 그리도 강력하던 이가 쉬이 고꾸라진 이유를. 어두운 병실 안임에도 불구하고 타오르는 유학의 안광이 흉흉했다. 그런 유학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웃었다.

“누이는 어렸고, 저도 어렸죠. 당연한 겁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어요. 그녀에게도, 혜화에게도. 잘못된 자는 없습니다. 무거운 죄를 짊어져야 하는 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역시 내가 계약자를 잘 골랐단 말이지. 환영한다. 나, 중도의 카라온의 계약자여. 우리는 오랜 약속에 따라 너의 영혼과 나의 존재를 걸어 새로운 계약의 페이지를 넘긴다. 그대여, 그대의 새로운 이름은?
“정 유학.”

-환영한다. 이 미쳐 돌아가는 세계에 다시 온 것을.

카라온의 말에 유학이 천천히 눈을 감자 카라온의 손끝에서 시작된 빛이 유학의 가슴에 닿았다. 옷을 통과하여 가슴에 닿은 빛이 기묘하게 꿈틀거리며 선명한 지팡이 위에 앉은 새를 그려냈다. 그 선명한문양이 유학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살을 태우는 고통에 유학이 입술을 짓씹어 피가 터지자 카라온이 손을 들어 핏방울을 훔쳤다.

-환영하네. 천 년을 뛰어넘어, 우리의 계약은 다시 맺어졌네. 천 년을 뛰어넘은 약속이 지켜짐과 동시에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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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18 [카게히나] 도시락    COMMENT. 0
161031 [ 하이큐 2차 / 탄생화&탄생목 모티브 짧은 글 ] #9. 코즈메 켄마    COMMENT. 0
160518 마츠하나 :: 한때는 그대가 꽃인 적 있었다.    COMMENT. 0
161004 [쿠로켄] 안녕이라는 인사에 시간을 묻고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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